그리운 대천덕신부님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권 요약. 4.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가?

doo-- 2020. 1. 2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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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가?

 

문의 편지 : 코이노니아에 대해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고 싶습니다.

 

신약 성경에 코이노니아(헬라어)를 교통, 사귐, 통용 등 구절마다 다른 단어로 번역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코이노니아란 단어는 헬라(그리스) 문학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의미 전달위해 신약저자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너무 평범한 단어로 번역하여 중요 사상을 잘 전달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신약성경에는 코이노니아가 많이 쓰였을 까요? 헬라 문학에는 거의 없는 단어가. 요한 11-7,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과 교제(사귐)을 가지기 원하셨다.”는 요한의 설명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코이노니아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과 코이노니아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붙어있는 개념 같습니다. 아가페가 일방적 사랑이라면(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기 전에 그분이 먼저 사랑), 코이노니아는 주고받는 방법입니다(하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주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아가페)을 베풀도록 해주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들과의 교제 속에 들어오게 되고, 다시 그들은 하나님, 예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교회에 오면 이들이 하나님과 교제 하게 된다는 것)

 

제가 보기에 코이노니아를 교통으로 번역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도로에서 일방통행과 쌍방통행이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쌍방통행하십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하나님과 쌍방통행 했는데, 스스로 막아서(선악과 사건을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유 택했다고 보시는 것 같음. 먹지 말라는 명령과 먹은 행위 사이에 자유가 존재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선택한 행위로 보심.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하는 것도 자유의지 가진 선택행위라고 할 수 있음) 예수님이 오셔서 다시 쌍방통행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통해 쌍방통행의 질서를 유지하시고자 노력하시고 계신데, 하나님 나라 도래를 통해 완전한 코이노니아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실 것입니다.

 

3:9 아담과 하와와 교제를 나누시고자 에덴동산에 왔다가 그들이 숨는 것을 보고 실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볼 때 죄는 교제를 끊어지게 만들며 성경의 드라마는 이것 때문에 시작 된 것입니다. 현재는 죄로 오염된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잠시 동안 가시게 된 것입니다(계시록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다시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하나님 나라 도래라고 보시는 것 같음).

모세의 증언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장막(성막)은 하늘의 하나님의 장막의 상징인데, 그 말은 하나님이 하늘의 장막에서(임시거주) 이 땅으로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계시고, 그 장막을 하늘로부터 옮겨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21:3). 우리들을 그 분의 교제 속으로 이끌어 들이기까지는 결코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서에만 신경 쓰다가 다정한 교제를 갖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제가 마비된 상태입니다. , 감상적인 사랑에 도취된 나머지 질서를 무시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붕괴에 이릅니다. 코이노니아는 두 가지 다 포함합니다.

 

사도신경에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서 바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에서, 교제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지는 교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죄 사함의 은총을 확신시켜 줍니다. 또 그것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서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며 죄 사함의 은총의 효력을 발휘하도록 해 줍니다. 요한일서 1장의 빛 가운데 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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